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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 이도수 교수의 <나의 연하스승님들> 소개시리즈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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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용 기자
기사입력 2021-03-08 [10:36]

▲ [인물포커스] 이도수 교수의 <나의 연하스승님들> 소개시리즈 (20)  © 더뉴스코리아


[더뉴스코리아=김두용 기자]
한상덕 교수는 국립경상대학교 800여명의 교수들 중에 강의평가에서 계속 1위를 차지해왔을 뿐 아니라 캠퍼스를 넘어 전국을 무대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명강사이다. 한상덕 교수와 특별한 친분을 유지해온 이도수 교수로부터 그의 인물평을 들어본다.

 

: 교수님은 전국적인 명강사 한상덕 교수를 어떤 인연으로 잘 아시게 되었습니까?

 

: 국립경상대학교 캠퍼스에서 같이 근무했지만 단과대학이 다르고 20년이라는 연령차가 있었기에 내가 재직 중에는 서로 모르고 지냈어요. 그런데 내가 퇴직하고 몇 년이 지났을 때 죽어가는 자기고향의 화개장을 살린 한상덕 교수라는 분의 이름이 언론에 뜨기에 귀가 번쩍 띄어 그 분을 만나러 진주로 갔어요. 만나서 그가 그 일을 하게 된 동기와 방법에 대한 얘기를 듣고 감탄했어요.

 

: 한상덕 교수가 자기 고향의 화개장을 살리기 위해 어떻게 했는데요?

 

: 화개장이라면 전국적으로 이름난 시골시장이었지요.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경상도와 전라도가 인접해있어 화개장날에는 경상도 말과 전라도 말이 뒤섞여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그의 성장기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었나 봐요. 최근에는 그 시골장이 죽어가는 것이 안타까워 고향을 살리기 위해 그 분이 기발한 발상을 했어요.

 

: 어떤 기발한 발상을요?

 

: 원숭이로 변장하여 장꾼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별별 쇼를 했어요. 소문을 듣고 그 진풍경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장은 다시 북적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쇼를 벌인 인물이 그 지역 출신 교수라는 것이 밝혀지자 그 지역이 들썩이고 그 소식이 전국뉴스로 파급되자 한상덕 교수는 일약 센세이션의 중심인물로 떠올랐어요.

 

: 그 분의 파격적인 행보에 대한 주위의 평은 어떠했습니까?

 

: 비판적으로 보는 소수가 있었지만, 절대다수가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었기에 전국각지에서 그 분을 강사로 초빙하는 경쟁이 벌어졌지요.

 

: 그 분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지요?

 

: 그 분의 가까운 친척들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교수라면 지역에서 제일 출세한 인사인데 금의환향은 커녕 원숭이로, 또 각설이로 시장판에 나타나 가문의 체통을 망가뜨린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나 싶어요. 그 분을 비판적으로 보는 또 다른 한 부류는 고루한 사고에 사로잡힌 교수들이었을 성 싶어요. 교수가 제자들에 대한 강의에나 충실할 일이지, 바깥으로 나가 인기몰이강연이나 하고 다니는 것이 바람직하나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거든요.

 

: 교수님은 그분의 행보를 어떻게 보시는 편입니까?

 

: 나는 그 분의 용기와 기발한 발상에 대해 감탄하다 못해 존경해마지 않게 되었어요.

 

: 그 분의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오게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 그 분이 경상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다닐 때부터 연극서클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면서 연출과 연기를 익혔기 때문에 무대체질이 되었다고 봐요. 대학의 강의평가에서 그 분이 단연 최고자리를 독점하는 비결도 강의안 작성을 연극을 연출하고 기획하듯 하고, 강의전달방식을 무대에서 연기하듯 하기 때문이라 봐요.

 

: 교수님이 그 분 강연을 직접 들어봤어요?

 

: 물론 들어봤지요. 내가 거주하고 있는 대구 동구 아양아트 홀에서 내 인생에 태클을 걸지마라는 주제로 두 시간 가까이 관중들을 사로잡는 강연을 들었어요.

 

: 강의 주제를 유행가 제목에서 따온 것 아닙니까?

 

: 맞아요. 실제 강의 중에 강사가 그 노래를 부르기도 해요.

 

: 강연내용이 흥미위주로 짜여 청중을 웃기기만 합니까, 청중들에게 뭔가 메시지를 전하기도 합니까?

 

: 메시지가 없으면 블랙코미디지요. 이분의 강연은 웃고 즐기면서도 여운으로 남는 메시지가 있어요. 그러기에 교수다운 강연이라는 평가를 받지요.

 

: “내 인생에 태클을 걸지 마라는 그 강연에서 남긴 메시지는 무엇이었어요?

 

: 누구나 세상살이에는 장애요인이 있기 마련인데 그 장애요인에 걸려 넘어져 주저앉지말고 일어나 앞만 보고 뛰라는 메시지이지요. 그 메시지를 그냥 훈계하듯 전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삶에서 부딪쳤던 장애스토리를 고백함으로서 강사에 대한 신뢰감과 존경심을 은근슬쩍 일으키더군요.

 

: 듣고 보니, 교수님은 한상덕 교수의 열렬 팬이군요.

 

: 맞아요. 내가 10년만 더 젊어도 그 분 흉내를 내어 나를 키워준 내 고장 대구의 자랑거리를 되살리는 일을 해볼 텐데...

 

: 대구의 자랑거리가 무엇이었는데요?

 

: 화개장이 경상도와 전라도 접경지역에 위치한 때문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시골장이 성립되었듯이 대구는 일본이 아시아를 경제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교두보로 대구 북성로에 미나까이 백화점을 차렸어요. 해방 전인 1940년대에 대구북성로의 미나까이 백화점은 명실공히 아시아의 물류유통의 허브이었어요.

 

: 왜 물류유통의 허브를 대구로 정했어요?

 

: 대구가 당시 영남제일의 도시였을 뿐 아니라, 경부선철도 선상에서 일본과 가장 가까운 거점 도시이었기 때문이지요.

 

: 그럼, 미나까이 백화점은 일본을 포함한 한국, 중국의 물류유통허브로 삼을 작정이었다는 말이네요.

 

: 맞아요. 일본의 대표상인가문출신인 나카에 도미주로가 경부선 내륙 교통요지 대구를 대륙 경제정복요충지로 삼았어요. 상업의 귀재 나까에 도미주로가 대구 북성로에 미나까이 백화점을 열자 조선의 상인대표격인 개성상인 이근무가 지척거리에 무영당을 개설하고, 경남갑부 이병철이 삼성상회를 열어 각축전을 벌였어요. 그러니 1940년대 초, 대구는 한국의 산업화시대를 열기위해 기지개를 편 시기라 할 수 있어요.

 

: 그 각축전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어요?

 

: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미나까이 백화점을 조선인종업원 노정주에게 물려주고 일본으로 도망쳤어요.

 

: 어떻게 그렇게 공들여 이룬 재산을 조선인에게 순순히 물려줄 수가 있었어요?

 

: 속내를 알고 보면, 쉽게 순순히 물려준 것이 아니었어요. 도미주로 사장의 외동딸 아나꼬와 한국인 종업원 노정주간의 은밀한 애정사가 진행되고 있었거든요. 아나꼬는 한국인 종업원 노정주의 사내다운 풍모에 반해 부모가 딸을 동경으로 보내 최고수준의 교육을 시키려했으나 반대하고 대구여고, 대구의전으로 진학하겠다고 고집부린 속내는 노정주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어요. 이걸 대구의 극일역사스토리로 알리는 문제를 두고 오래전부터 고민해 왔어요. 내가 한상덕교수의 고향 살리기 위한 행보를 보고 그를 연하스승으로 흠모하게 된 것은 내가 감히 엄두도 못낸 일을 감행한 그 분의 용기와 지혜 때문이었지요. 흘러간 물이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지만 나는 아직도 돌려보려고 용을 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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