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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 이도수 교수의 <나의 연하스승님들> 소개시리즈 (13)

서진택 제자가 졸업 38년 후인 이도수 정년퇴임 때 보낸 영문편지 한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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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용 기자
기사입력 2021-02-22 [13:03]

 

▲ [인물포커스] 이도수 교수의 <나의 연하스승님들> 소개시리즈 (13)  © 더뉴스코리아


[더뉴스코리아=김두용 기자]
40여년 교직생활 중에 세 번의 기적적인 교육성과를 거두었다는 이도수 교수로부터 그 두 번째 기적적 교육성과를 거둔 얘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 교수님의 교직생활 중에 두 번째로 기적적인 성과를 거둔 때가 언제였습니까?

 

: 28세 때였던 1968년도에 당시 문교부로부터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 떨어졌어요.

 

: 어떤 명령이었는데요?

 

: 영어를 영어로 수업(TEE:Teaching English in English)하는 최초의 시범수업을 나에게 하라는 명령이었어요.

 

: 영어수업에서 우리말을 전혀 쓰지 않고 100%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라는 명령입니까?

 

: 그래요. 당시 우리나라의 각급 학교 영어 수업은 100% 문법-번역 식 수업이었거든요.   

 

 

▲ [인물포커스] 이도수 교수의 <나의 연하스승님들> 소개시리즈 (13)  © 더뉴스코리아


: 그 어려운 과제를 도시명문학교들을 두고 왜 군위중학교라는 시골중학교에 맡겼나요
?

 

: 첫째 이유는 영어교사를 양성하는 국립사대 영어과 중에서 영어를 영어로 수업하는 방법을 조금이나마 맛이라도 보인 데는 경북사대 영어과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에서 Henderson이라는 미국인 교수로부터 TEE 교수법을 전수받아온 이규동 교수가 국내 유일의 TEE 영어 교육 전수자였어요. 경북사대 영어과 교수 6인중에 다른 젊은 교수들은 전혀 시도할 엄두를 못 내었는데 그 원로 교수님 혼자 시범을 보였어요.

 

: 그 분의 지도를 받은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 소위 도시일류학교에 근무하는 영어 교사에게 그런 그 막중한 과제를 맡기지 않고 왜 교육환경이 열악한 농촌중학교에 맡겼지요?

 

: 그 실험을 도시학교에 맡겼다가는 학부모들의 반발로 중도 포기해야할 판이었기 때문이었어요.

 

▲ [인물포커스] 이도수 교수의 <나의 연하스승님들> 소개시리즈 (13)  © 더뉴스코리아

 

: 왜 그렇습니까?

 

: 당시 학부모들이 자랄 때의 영어 교육은 완전 문법-번역 식 교육이었기 때문이지요. “반풍수 집구석 망하게 한다.”는 말처럼 그런 고지식한 사고 때문에 새로운 영어 교육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풍토가 지속되었어요. 그런 점에서 군위중학교 같은 시골중학교가 실험대상으로 안성맞춤이었지요. 학부모들의 무지덕택으로 그 자녀들을 상대로 한 실험을 마음 놓고 할 수 있었으니까요. 정작 문제는 학생들에게 있었어요.

 

: 학생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는데요?

 

: 재력 있는 부모의 학생들은 모두 도시중학교로 진학하고 시골중학교에 남아있는 학생들은 하교하기 바쁘게 농장으로 내몰려 반머슴 노릇해야 공납금을 받아낼 수 있었어요. 그런 환경에 처한 시골 학생들은 영어나 수학 같은 어려운 과목을 포기한 학생들이 대다수였어요. 그나저나 나에게 떨어진 명령은 거스를 수가 없었기에 위기를 기회로 잡아보자는 비장한 결심으로 나의 초등 6학년 때의 호랑이 담임선생님의 방식을 흉내 내기로 결심했어요. 당시 내가 실험 군으로 지정한 2-3반에게는 얼마나 엄하게 대했던지 내 이름과 비슷한 별명 독수리 샘으로 불렸어요.

 

: 그렇게 해서 그 시범수업이 성공했어요?

 

: , 대박이었어요. 19681120, 군위중학교 생긴 이래 가장 많은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2학년 3반 영어 수업은 우리말 한 마디 않고 영어로 진행하여 300여명의 참관자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어요. 특히 나에게 TEE 방식을 전수하신 대학은사 이규동 교수님이 정년퇴임을 2년 앞둔 고령인데도 그곳 시골학교까지 원어민 Mr.Travice를 데리고 오시어 과분한 찬사로 격려해주셨어요.

 

▲ [인물포커스] 이도수 교수의 <나의 연하스승님들> 소개시리즈 (13) / 서진택 제자가 졸업 38년 후인 이도수 정년퇴임 때 보낸 영문편지 한 구절     ©더뉴스코리아

 

 

: 그 시범수업이 일회성 실험으로 끝나지 않고 국내 여러 학교로 파급되었어요?

 

: 그 파급속도가 지지부진하자 교육부에서 나를 TEE 전도사로 내세워 나를 서울로 불러올려 UNESCO 본부 건물에서 전국각도 대표들을 상대로 설명회와 시범수업을 시켰어요. 그것으로도 미진하자 나에게 고등학교 입시 영어 과목의 출제를 맡겨 문법-번역 식 영어교육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했어요. 그로인해 나는 영어교육의 스타가 되었어요.

 

: 교수님께서 68년도 TEE 실험대상으로 삼았던 군위중학교 2학년 3반 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한 후에 그 교육에 대한 효과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는지가 궁금한데요.

 

: 실은 내가 그 얘기를 주로 하고 싶은데, 자화자찬으로 들릴까 걱정되네요. 그 실험수업의 결과로 영어 mania가 되어 행운의 열쇠를 갖게 되었다는 두 제자의 얘기를 소개할게요. 당시 2학년 3반 영어수업에 들어가면 대다수 학생들은 바짝 긴장해 있는데 두 학생이 반색을 하며 서로 발표를 하려고 손을 들다가 지명 못 받으면 벌떡 일어서서 소란을 피우는 통에 그 학급의 영어수업은 활기를 띄었어요.

 

그 중 서진택은 5남매 중 중간이면서 남자 중 장남이었는데 편모슬하의 가난한 농가에서 공납금을 제때 못 내어 공납금 받아오라고 집으로 쫓겨 가기가 일쑤였어요. 서군은 우리말은 약간 더듬어도 영어에는 유창하기에 영어를 위해 태어났는가 싶을 정도의 영어 마니아였어요. 또 한 학생 사공성호는 중간농사꾼 집안의 4형제 중 셋째라 집에만 가면 농사꾼 행세를 해야 할 입장이었어요. 그런 두 학생이 영어가 행운의 열쇠였다고 70세 가까운 지금까지 자랑하고 있어요.

 

: 그 자랑의 근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시지요.

 

: 사공성호제자는 군위중학교를 졸업한 후, 군위고등에 진학해서 불만에 쌓여 나에게 대구시내 고등학교에 전학을 부탁하기에 나의 친척이 간부로 있는 모 고등학교에 전학을 알선해주었어요. 전학간지 며칠 만에 영어선생님이 그날 배울 영어교과서 내용을 읽어보라고 하더래요. 이 학생은 학교에서 채택한 영어교과서를 구하지 못해 옆자리 학생의 책을 빌려 줄줄 읽으니 영어선생님이 깜짝 놀라며 어느 학교에서 전학 왔느냐고 꼬치꼬치 물으면서 탄복하더래요. 이듬해 그 분이 담임이 되자 학급반장에 임명하고, 훗날 학교전제대대장으로 임명되었대요. 이런 경우를 두고 낭중지추라 표현하지요. 주머니 속의 송곳이 저절로 뚫고나오듯 뛰어난 재능은 저절로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말이지요. 이 사람이 훗날 한국소방본부에서 처장에 까지 오른 후, 영어실력 덕으로 박사학위를 받아 수원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정년퇴임했어요.

 

: 또 다른 영어 마니아 제자는 어떻게 되었어요?

 

: 서진택이라는 영어 마니아 제자는 가난하여 대학진학을 못하고 육군 3사에 입교하여 장교가 된 후, 군 복무 중 한국외대 석사 과정까지 수료하고 미국 국비 유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하여 유학을 마친 후, 8군소속 통역 장교로 근무했대요. 군 제대 후 영어가 절대 필요한 무역 관련 업체에서 근무한 후 정년 퇴임했다나요. 그러나 70세가 가까운 현재까지도 미 정보 사령부 최전방기지 민통선 안쪽에서 용역으로 근무 중이라 해요.

 

: 두 영어 마니아 제자 외에 그 실험 반 소속 제자들과는 졸업 후 교호작용이 없었어요?

 

: 왜 없어? 졸업한지 32년만인 2000년도에 인천송도호텔에서 수도권 거주 동기생 20여명이 모여 나의 회갑연을 베풀어주었어요. 그로부터 3년 후에는 대구거주 그들 동기생 대표 이기광(당시 대구고등법원부장판사)의 주도하에 20여 동기들이 나의 정년퇴임축하연을 베풀어 주었어요. 그들에게 매로 다스린 것 밖에 없는 나에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고 사은회까지 베풀어주다니 그들이야말로 청출어람의 본보기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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