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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 이도수 교수의 <나의 연하스승님들> 소개시리즈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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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용 기자
기사입력 2021-02-15 [10:23]

 

▲ [인물포커스] 이도수 교수의 <나의 연하스승님들> 소개시리즈 (9)  © 더뉴스코리아


[더뉴스코리아=김두용 기자] 40
여년 교직 생활 중에 세 번의 기적적인 교육성과를 거두었다는 자부심을 가진 이도수 교수로부터 그 첫 번째 기적적 교육성과를 거둔 얘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 교수님의 교직 생활 중에 첫 번째로 기적적인 성과를 거둔 때가 언제였습니까?

 

: 27세 때였어요. 1967년에 군위고등학교라는 농촌학교에서 고3 문과반 담임을 맡아서 그 학교로서는 획기적인 대학 진학 성적을 올렸어요.

 

: 그 반에서 대학에 진학한 학생 총 수가 얼마쯤 되었어요?

 

: 14명이었어요. 당시 농촌학교는 정원 60명을 못 채웠어요. 내가 맡은 고3 문과 반은 43명이 졸업했어요. 그 중 대학입시 준비를 한 학생은 17명이였으니 80%의 합격률을 올린 셈이었지요. 그 학교가 개교한지 14주년이 되었는데 13회까지 대학진학자 총 수 보다 그 해 한 해의 합격자 수가 더 많았다고 했어요.

 

: 대학합격자 수도 중요하지만 진학하는 대학의 수준이 관심대상이 되지 않을까요?

 

: 물론이지요. 13회까지 대학진학자 총 수가 9명이었는데 질적으로 가장 높은 대학이 경북대학교 문리대 국문과였대요. 거기를 졸업한 사람이 당시 모교인 군위고등학교에 교사로 근무했기에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 교수님이 그 학교에서 입시에 기적적인 성과를 거둔 비결이 무엇이었어요?

 

: 학생들에 대한 무한 관심과 열정이었어요. 그곳 학생들은 교사들의 무관심에 대한 반항심이 있었기에 내가 거칠어도 그들에게 쏟는 무한열정에 대해 고마워했어요.

 

: 다른 선생님들은 왜 학생들에게 무관심했어요?

 

: 당시 공립학교 교사 인사이동에서 순환근무제라는 원칙이 있었어요. 다수 교사가 도시학교근무를 선호하기에 도시학교에서 장기 근무한 교사를 시골학교로 보내어 2-3년 근무하게 한 후에 다시 도시학교로 복귀시켰어요. 이런 인사원칙이 시골학교를 멍들게 했어요.

 

▲ [인물포커스] 이도수 교수의 <나의 연하스승님들> 소개시리즈 (9)  © 더뉴스코리아

 

: 왜요?

 

: 도시학교에서 장기 근속한 베테랑 교사들은 시골학생들의 초라한 차림과 학부모들의 무관심에 의욕을 상실하고 시간 때우기 근무를 했어요. 학생들은 부모의 재력부족 탓이든, 자신의 성적부진 탓이든 도시학교로 진학 못한 데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 그런데 교수님은 어떻게 학생들에게 무한관심을 기울이고 열정을 쏟을 수 있었어요?

 

: 내가 그 학교로 전입하기 전에 근무한 분교에서 전공과목인 영어 외에 물상, 체육, 미술 등 온갖 잡동사니과목을 가르치느라 죽을 고생을 하다가 이 학교에서 영어만 가르치게 되니 지옥에서 천국으로 온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반대로 도시학교에서 이곳으로 전근 온 베테랑 교사들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라 시간 때우기에만 급급했어요.

 

: 이해할 만 하네요. 그런데 교수님께서 학생들에게 무한 관심을 쏟으셨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무한관심을 쏟으셨어요?

 

: 대학진학을 권해 볼 만 하다 싶은 학생들 집을 방문하여 부모님들에게 힘들더라도 뒷받침해서 진학을 시키도록 하라고 적극 권했어요. 또 통학거리가 너무 먼 학생들을 학교가 가까운 나의 주거지 근처에 자취방을 얻어 2-3명이 같이 공부하도록 하면서 감시하곤 했어요. 내가 바로 그해 초에 결혼하여 농가에 방 한 개를 세 얻어 신 살림을 차리고 있었기에 호박 적을 굽어 자취하는 학생들에게 갖다 주곤 했어요.

 

: 그런 관심도 중요하지만 대학입시는 입시중요과목의 학력을 고루 높여야 하는데 담임선생님이 다른 과목 지도를 할 수가 없잖아요?

 

: 예 그게 제일 문제였어요. 그래서 학급담임인 내가 방과 후에 대학 진학 희망자만 남게 하여 초등 담임교사처럼 무시간의 경지에 빠져 영어만 가르쳤어요. 그렇게 하니까 과외 지도비라며 얼마씩 거두어 주기에 그걸 국어 담당 선생님에게 드리면서 국어를 좀 지도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렇게 1학기를 보내고 나니 영어에 물미가 트이는 학생이 상당수 보이기에 긴긴 여름방학 동안에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영어를 지도했어요. 영어와 국어에 자신이 제법 생기니 수학은 각자 독학으로 해결하더군요.

 

: 그렇게 획기적인 대학입시성과를 올림으로서 지방민들로부터 환호를 받았겠네요?

 

: 지방민들은 그냥 덤덤하고 일부 학부모들은 고등학교 학비 부담도 버거웠는데 몇 배 무거운 대학 학비를 어떻게 댈까 걱정만 하더군요. 그만큼 당시는 살기 어려웠어요. 그래도 학생들로부터는 분에 넘치는 감사표시가 있어서요.

 

: 어떻게 감사표시를 했는데요?

 

: 학생들이 재학 중 3년 간 저축한 저축금 전액을 몽땅 모아 나에게 양복 한 벌 대금으로 전해주었어요. 돈이 없어 졸업앨범 제작도 못했으면서 말입니다. 당시 양복 값이 얼마나 비쌌느냐 하면 장가갈 때 양복 한 벌 얻어 입으면 처가가 부잣집이라 했어요. 그걸로 끝이 아니었어요. 그로부터 33년 후에 나의 회갑연을 대구 아리아나 호텔에서 베풀어 주었어요. 내가 그 후 여러 학교를 거쳤지만 이들만큼 정을 표시하는 예는 없었거든요.

 

: 33년 후에 만났을 때 참석자가 어느 정도였으며 그들의 사회진출상황은 어떠했습니까?

 

: 졸업 총원 43명 중 34명이 참석했어요. 참석률도 놀라웠지만 그들이 사회에서 이룬 성취에 감탄했어요. 사시에 합격하여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고 있는 사람, 항공기술 분야 CEO한 사람, 철골기술명장 1인 등 초특급엘리트가 3, 또 대구시청 서기관 1, 군위읍장을 거쳐 군의회의장, 군위군 소방서장, 중등 교장 1인 중등교감 1, 초등교장 6, 간호사 3, 중견행정직 공무원 3, 대기업 간부 1, 중소기업 사장 1인 등 나름대로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20명이 넘었어요. 내가 그들을 졸업시킨 지 몇 년 후에 한국 3대 명문고로 알려진 K고등에서는 법정학급정원 60명을 꽉 채워 졸업시켰는데도 사회에서 성공한 인재가 이 시골학교보다 별로 많지 않았거든요.

 

: 그건 왜 그렇습니까?

 

: 수재 집단 속의 상대적 열등생은 보통 집단 속의 우등생보다 못한 경우가 허다해요. 군위고등졸업생 중에는 웬만한 사람은 일반 행정직공무원이나 경찰직시험에 합격한 후 성실히 근무하여 대학졸업자 못지않게 진급하는 예가 수두룩한데, 명문고등 졸업자들은 하늘에서 별 따기만 기대하다가 인생낙오자가 되는 예가 적잖거든요.

 

: 교수님 회갑연 때는 제자들로부터 따가운 질문을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 왜 없어. 그날 두 사람으로부터 가슴이 뜨끔한 항의를 받았어요. 여학생 대표로부터는 남학생들에게는 대학가도록 열심히 공부하라고 그처럼 닦달하시면서 여학생들한테는 왜 단 한 번도 공부하라고 채근하시지 않으셨어요?” 또 당시 출석부 정리를 맡았던 한 착실한 남자로부터는 3 때 연애에 빠져 결석 몇 주 했다고 선생님이 퇴학시킨 김ㅇㅇ에게 너무 심하지 않았습니까?” 이에 내가 이렇게 변명했어요. “솔직히 당시 내가 철 덜든 병아리교사였어. 내가 자랄 때 '여자는 공부 많이 하면 건방져서 시집살이 잘 못한다.' 학생이 연애에 빠지면 공부는 물 건너갔다.'와 같은 말만 듣고 자랐거든. 자네들은 나를 전지전능 선생으로 우러러 봤을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내가 당시 자네들과 같이 자란 20대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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